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근대 일본의 관위와 역직 (문단 편집) ==== 정1위 ==== [include(틀:정1위)] 정1위는 일본의 관위 체계하에서 최고의 품계이다. 통상 어떤 직이 정1위라 규정된 것은 아니고, 주요 고위 [[관료]]가 큰 공을 세운 경우 생전, 혹은 사후에 이 위계를 부여받았다. [[조선]]에도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라는 품계가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. 차이점이라면 원평등귤(源平藤橘, [[미나모토]]·[[타이라 가문|타이라]]·[[후지와라]]·[[타치바나]])에 속하는 귀족가문 출신이 아니면 생전에 일본의 정1위 품계를 받기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것이다. 이는 고대 왕조 시절의 뼈대가 중세까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으로 [[한국사]]와 비교하면 같은 고대 율령제 국가인 [[신라]]의 [[골품제]]와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. 그나마도 정1위를 죽은 다음에 공적을 기리는 명예직처럼 운용했기 때문에 사후에 추증받기는 비교적 쉬웠지만[* 가령,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에 추서된 시마즈, 모리 가문 당주, 거의 대부분의 도쿠가와 막부 쇼군, 심지어 일개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 같은 인물도 받았다.] 생전에 정1위를 받기는 일본에 존재했던 그 어떤 관위보다 넘사벽으로 어려웠다. 일본 역사상 정1위를 생전에 받은 사람은 총 '''7명'''이다. 724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미야코, 737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무치마로, 749년에 받은 [[타치바나노 모로에]], 762년에 받은 [[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츠|후지와라노 나카마로]], 770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나가테, 1146년에 받은 미나모토노 마사코, 마지막으로 1891년에 받은 [[산조 사네토미]][* 산조 사네토미는 그나마 죽기 바로 직전에 유신시대의 유일한 태정대신으로서 사실상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을 맡았음에도 기록상 [[이토 히로부미]] 초대 [[일본국 내각총리대신|내각총리대신]]에게 밀린 반대급부로 정1위를 주었을 뿐이다. 유신 후라 사후추증이나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의미뿐이었다. 다만 산조는 태정대신을 지낸 후 초대 총리는 되지 못한 대신 2대 [[구로다 기요타카]] 총리가 사임한 후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가 취임할 때까지 잠시 총리 권한대행을 한 적은 있다.] 등이다. 생전에 제대로 정1위 품계를 받은 자들은 모두 13세기 이전 4대 명문 원평등귤 소속 인사들뿐이다. 전국시대에 천민 출신으로 아득바득 출세해 관백이 되어 원평등귤의 유리천장을 깬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도 생전 정1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. 차라리 천황을 시해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기가 더 쉬웠을 수준. 일본의 [[전국 3영걸|3대 천하인]] [[오다 노부나가]]·[[도요토미 히데요시]]·[[도쿠가와 이에야스]] 3명은 전부 사후 정1위에 추증되었다.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후 약 1년 뒤인 1617년 4월 14일 추증받았는데 당시가 에도 막부 시절이어서 당연했던 것이고,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[[다이쇼 시대]]인 1915년 8월 18일에 와서야 추증되었으며, 오다 노부나가는 1917년 11월 17일 추증된 최후의 정1위이다. 3대 천하인 중 두 명이나 사후 수백 년이 지나 의례적으로 겨우 받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 정일위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